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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다이어리제주]세계여행을 꿈꾸다 '어떤바람'타고 제주행(서빈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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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왓뉴스 = 편서빈/여수진 기자] 무채색 도시 속에서 형형색색 원색의 세계여행을 꿈꿨던 직장인. 세계로 떠날 꿈을 꾸며 회색도시에서 버텨온 시간. 드디어 세계로 떠날 기회를 잡았고, 첫 여행지는 뉴질랜드로 결정했다. 그렇게 그녀가 도착한 곳은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아름다운...

 

제주도.

 

세계여행을 꿈꿨으나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 눈물을 머뭄고 제주도로 발길을 돌렸다. 비행기라도 타봤으니 다행일까? 갈 곳을 잃고 도착한 제주도에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주)

 

 

용기 내 ‘퇴사’만 하면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펼쳐질 줄 알았다. 적당히 ‘총알’만 충전되면 이 땅을 떠나 세계를 누비리라. 매일 아침 거무튀튀한 옷을 입은 무리들과 함께 공기를 공유하며, 나는 지옥철에 몸을 구겨 넣었다. 간신히 땅 속을 빠져나온 후엔 현기증을 유발하는 빌딩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난 3년을 그렇게 꾸역꾸역 버텼다. 

 

2020년, 인고의 시간을 지나 결전의 날이 다가왔고나는 그간 깊숙이 숨겨 놓았던 버킷을 흔들었다. 드디어 ‘세계 여행’이라는 녀석을 꺼내 들었다. 저 멀리 지구의 끝 뉴질랜드에서 시작하여 방랑자의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누군가 하늘에서 이런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코로나라는 강력한 역병이 전세계를 휩쓸었고, 나는 계획에도 없던 이 곳 제주에 떠밀려 내려왔다.

 

이번 제주 방문이 처음도 아니다. 수학여행, 가족여행, 배낭여행 등 온갖 여행이란 여행의 이름으로 제주를 찾았었다. 속으론 나는 웬만한 관광지는 이미 섭렵했다고 자부했다. 그리하여 세운 여행의 테마는 바로, ‘살아보자 – 부제 : 세계여행 준비’ 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침 일찍부터 숙소를 나서 관광을 하고 싶지 않았다.언택트 시대에 발맞춰 사람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하되 오롯이 제주를 느껴보고 싶었다. 또한 세계여행의 꿈은 완전히 접은 것이 아니라 잠시 ‘제쳐’둔 것이었기에 이번 제주 생활을 보다 탄탄한 세계 여행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싶었다.

 

일단, 도심과 떨어져 제주만의 자연 내음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숙소를 정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시설의 호텔보다는 시골집에 내려온 듯한 정감을 느낄 수 있는 조그마한 가정집을 택했다. 특히 공용공간을 가장 꼼꼼하게 살폈다. 주로 숙소에 머무르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듯 하루하루를 여유로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감히 운명이라 말할 수 있을 까. 다행이도 나의 깐깐한 조건을 만족하는 장소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황빛의 따스한 조명 아래,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창을 너머 우뚝 솟은 산방산을 집 안에서도 즐길 수 있는 바로 이 곳. 내 여행 주제에 딱 떨어지는 최적의 공간을 만난 것이다.

 

 

오랜만에 학생으로 돌아간 듯 했다. 세계 여행을 위해 큰 맘 먹고 마련한 배낭은 ‘책가방’으로 전락했다. 가방은 본분을 잃고 한 달치 스페인어 학습지와 읽을 책으로 가득 채워졌다. 숙소의 다른 투숙객이 관광을 위해 분주하게 집을 나설 때, 나는 가방을 둘러메고 공용공간으로 나와 책을 펼쳤다. 고3 수험생 못지않은 뜨거운 학구열이 제주에 와서야 분출한 것이다.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학습지를 풀고 책을 읽어 댔다. 가끔 책에서 눈을 뗄 때마다 날 반기는 아기자기한 돌담과 산방산 자락이 나를 싱긋하게 했다.제주의 포근함은 마음 속 여유 뿐 아니라 지적 성취감까지 내게 안겨주었다.

 

 

아무리 이 곳이 제주라도 가끔 집콕의 따분함이 느껴질 때면 동네를 나섰다. 타인과의 땀내나는 소통이 어려워진 요즘, 제주도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 받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동네 책방을 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방산 절경에 넋을 뺀 채차로 십 분을 달리면 사계리 <어떤 바람>이라는 소소한 책방에 다다를 수 있다. 이 곳은 소위 감성을 자극하는 몇몇 소품과 함께 책방 지기의 관심사 이모저모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선반에 놓여진 책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면 마치 어떤 이의 사적인 공간을 훔쳐 본 듯 쑥스러워 진다. 어느 책 한 권도 허투루 놓여진 것이 없다. 구석 구석에 책을 향한 책방 지기의 고민과 애정이 묻어나 있다. 넓은 듯 넓지 않은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면 이미 책방 지기와 마음을 나눈 친구가 된다. 실제로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지만 기나긴 대화를 마친 듯 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냥 방 안에 누워 손가락 몇 번 움직여서 책을 배달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심지어는, 서점에서 마음에 든 책을 기억해 뒀다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더 저렴하게 책을 구입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는 기꺼이 내 발로 독립 서점을 찾고 그 곳에서 정가로 책을 가져온다. 그들은 단순히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책들을 정해진 질서에 맞게 진열해 놓지 않는다. 또한 ‘돈의 움직임’에 따라 책의 위치도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독립 서점은 그 곳이 아니었다면 내가 눈길도 주기 힘들 책을 발견하게 해주고 안내해주는 고마운 공간이다. 자본주의의 검은 손짓을 벗어나 책방 지기의 정성 어린 손길에 감사하며 나는 오히려 행복한 마음으로 책을 데려온다.

 

 

그간 도시에서 누릴 수 없었던 이 같은 호사 덕분에, 제주에서의 생활을 언제까지 이어갈 지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스페인어를 한국말처럼 구사하고, 매일 밤 약을 입에 틀어 넣지 않아도 편안히 잠들 수 있는 그 날까지 이 곳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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